이동 삭제 역사 ACL 도끼 (r2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나무 베는 용도 ===== [[파일:50520-2-7168.jpg]] [[파일:24471-medium-size.jpg]] 실제로는 위 유물보다 날이 훨씬 크고 자루도 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일:벌목도.jpg]] [[채용신]]의 벌목도. [[파일:AD221001-1.jpg]] 20세기 민화인 고사인물도 중 도2. '''한국 중세 [[배틀액스]]의 직계후손이다.''' 군용도끼로서의 맥이 끊긴[* 정확히는 도끼를 군용으로 쓰지 않은 지 오래인.] 지금도 충분히 갑옷을 파괴하고 인마를 살상할 수 있는 엄연한 실전무기다. 일제시대에 왜도끼[* 정확히는 후술할 마사카리.]가 들어오고 산업화 시기에 산림 보호를 위해 민간 차원의 벌목을 금지하면서 거의 보기 힘들어진 한국의 전통 도끼다. 장작도끼와는 달리 배틀액스답게 날이 상당히 얇으며 위아래 폭도 매우 넓은 편이다. 날 꽁무니 부분이 [[장도리]]의 노루발처럼 뾰족한 게 특징. 보다시피 중국의 무기인 [[대부#s-2|대부]]와 비슷한 점이 많다. 힘 좋은 장정의 경우 이걸로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찍어 넘길수가 있었다고 한다. [[호미]], [[조선낫]], [[괭이]]와 함께 나름 일제시대에 일본 농학자들을 감탄케 했던 조선의 농기구 중 하나. 무기로 쓰였다고 해서 단순히 낫이나 괭이처럼 농기구를 임기응변식으로 쓴 거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의외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 때까지 올라가는 나름 근본 있는 무기다. [[고구려]]의 도끼병사인 부월수가 유명하며, 그 후신인 [[발해]]에서도 도끼를 많이 사용했다. 한국은 고구려 때부터 [[온돌]] 때문에 --구한말쯤엔 민둥산이 대부분일 정도로-- 다른 나라 문화권에 비해 나무를 베고 장작을 팰 일이 유난히 많았는데, 이 탓에 고대~중세 한국에서 ([[높으신 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들이 도끼질 장인이었고, 전쟁에 도끼 들고 나갔을 때도 별 훈련 없이도 적군을 잘만 썰었기 때문(...).[* 비슷한 이유로 [[편곤]]도 사실 엄밀히 따지면 평범한 [[플레일]]류 무기지만 '''사용자가 하필 [[도리깨]]질에 도가 튼 농민들이라''' 전장에서 흉악한 위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 오위진법에서도 상황에 따라 창검류 대용으로 도끼를 쓸 수 있다고 명시된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른 후에도 널리 통용된 모양이다. [[삼국지연의]] 등에서 이따금 [[자객]]처럼 등장하는 '도부수'(刀斧手)는 이러한 도끼(斧)와 큰 칼(刀)을 사용하는 군사들을 가리킨다.[* [[삼국지연의]]나 [[초한지]]의 [[홍문연]] 등에 등장하는 도부수는 말 그대로 큰 칼이나 도끼를 들고 호위병인 척하고 서 있거나, 정 뭐하면 장막 뒤 같은 데 숨어있다가 지령이 떨어지면 튀어나와서 목표를 베어 죽이는 역할을 맡았다. 즉, 흔히 생각하는 자객과는 달리, 말 그대로 목표를 대놓고 [[척살]]하는 사람들인 것. 사실 자객도 일단 너 죽이고 나 죽자 식으로 자기가 살아남는다는 선택지는 포기하고 기회만 보이면 바로 찌르는 경우가 오히려 많았다.] [[탄금대 전투]] 당시 [[김여물]]이 죽기 직전에 [[신립]]과 비장한 작별을 하고 [[대부#s-2|대부]]를 휘두르며 적진에 뛰어들었다는 기록이나, [[인조반정]] 당시 (조선시대판 [[온달]]로 유명한) 이기축이 [[창의문]]을 도끼로 파괴했다는 등의 기록을 볼 때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조선군의 엄연한 주력 무기 중 하나이자 [[맹장]]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듯하다. 심지어 의외로 [[창]]보다도 많이 쓰였다고 하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부터 이미 도끼가 창에 비해 리치가 너무 짧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사실 이는 조선의 창이 다른 나라 창들에 비해서 짧아서 선호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일본에선 길고 튼튼한 목재가 흔했던 반면에 조선에선 이런 좋은 나무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 결국 도끼는 조선 후기엔 조선군에서 완전히 퇴역하고 본업인 농기구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게 되게 된다. 하지만 근본이 근본이다 보니 형태 면에서 앞서 말한 한반도 고대~중세 배틀액스에서 크게 바뀐 점이 없다.[* 사실 배틀액스라지만 한반도의 전투용 도끼는 일반 작업용 도끼에서 형상이 크게 바뀐건 없다. 당장 고구려 부월수가 썼던 도끼 유물도 보다보면 배틀액스가 아니라 그냥 나무베던 평범한 작업용 도끼를 전쟁터에 들고 나왔다고 하는게 더 어울릴 정도로 전투만을 위한 특징이랄게 없다. 이는 전투도끼로 양손도끼를 주로 쓰던 동아시아의 특성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것이다. 서양에서 도끼를 전투에 쓰면 대개 한손도끼를 쓰므로, 한손만으로 가볍게 휘두르기 위해 도끼날을 얇게 만들어 대폭 경량화 하는 등 누가 봐도 전투용이란걸 알수 있을정도로 특화를 시키고, 양손도끼도 데인액스처럼 눈에 쉽게 뛸 정도로 상당한 경량화를 시키는데, 한국이나 중국에서 쓰인 전투용 도끼는 대개 양손으로 휘두르는거라 평소 나무 베는데 쓰던걸 그대로 가져와도 전쟁터에서 문제없이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인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의례용 도끼인 은월부.[[http://www.koreantk.com/ktkp2014/craft/craft-view.view?craftCd=ktc000806|한국전통지식포탈 출처]] 금색으로 칠한 것은 금월부, 날이 양쪽으로 달린 것은 은작자/금작자라고 한다. 본래 나무로 만들어 칠을 한 것이지만, 크기를 줄이는 대신 진짜 금속으로 만드는 것도 있었다. 이것은 소(小)자를 붙여 소금월부라 하였다.([[http://kyujanggak.snu.ac.kr/dohae/sub/schDetail.jsp?no=D0159&category=E&sWord=%EB%8F%84%EB%81%BC|참조]]) 청나라 때 도끼 유물 중에 비슷한 게 있다.[[https://kknews.cc/zh-hk/culture/m3mxonz.html|#]]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릴 때 드물게 사용하던 도구이기도 하다.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도끼를 지닌 채 상소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상소를 받지 않으면 차라리 자신의 목을 찍어 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도끼로 목을 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 과격한 상소를 올릴 정도라면 적어도 그 본인은 그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간 출세에 미친 관심종자로 사대부 사회와 조정에 이름 석자 단단히 각인시키는 꼴이 되기에 여러 날 숙고한 뒤에 행동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조정에서도 함부로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조정의 주요 인사가 이 지부상소를 올리면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없던 일개 선비가 올린다고 해도 이런 상소가 올라올 정도면 이전부터 이미 상소에서 언급하는 문제로 논란이 커져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명한 지부상소로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 개화를 반대하며 올린 [[최익현]]의 지부상소가 있다. 다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지부상소는 대부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양반들이 올렸다. 조헌도 그렇고, 최익현도 일개 시골선비가 아니라 중앙관료 출신이다.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8.226.34.223)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